아주 먼 옛날, 국내 TV에서 성우 더빙으로 방영한 외화 시리즈가 있었습니다. 제목은 <케빈은 열두 살>. 미국 ABC 방송국에서 1988년 방영을 시작한 이 작품은 1960~70년대 찌질한(!) 사춘기 소년 ‘케빈’의 시점에서 펼쳐지는 드라마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케빈이 처음 알려준 발렌타인데이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나는 십 대 초반 이 드라마의 광팬이었다. 라고 적고 나니 자연스럽게 나이가 가늠되네. 당시 이 드라마를 너무나 좋아해서 국내 본방은 물론, 당시 AFKN이라는 주한미군을 위한 TV 채널에서 방영하는 원어 방송도 챙겨보았다. 라고 적고 나니 자꾸 내 무덤을 스스로 파는 것 같지만 어쨌든. 그때 자막도 없이 영어로만 이어지던 드라마 내용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지만 분위기와 느낌으로 유추하며 열심히 시청했다.

케빈에게는 짝사랑하는 여학생, 위니가 있었다. 키 작고 곱슬머리에다 주먹밥처럼 생긴 케빈과는 반대로 위니는 키도 크고 찰랑거리는 생머리에, 누가 봐도 눈에 띌 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었다. 게다가 성격도 다정해서 케빈과 어색하지만 소중한 우정을 지켜나갔다. 그런데 여느 짝사랑이 그렇듯 날이 갈수록 위니에 대한 케빈의 마음은 커져만 가고, 케빈은 발렌타인데이에 위니에게 고백하기로 결심한다. 엉성하게 꾸민 빨간 하트 모양의 초콜릿 상자에 이렇게 써서. ‘위니, 내 발렌타인이 돼 줄래?’
이 장면을 보면서 처음으로, 진정한 발렌타인데이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 나는 발렌타인데이를 ‘초콜릿데이’로 알고 있었다. 미국에는 ‘발렌타인’이라는 이름의 초콜릿이 있어서 이름이 발렌타인데이일 거라고 멋대로 믿었다. 하긴, 당시 내 또래들 역시 발렌타인 데이가 되면 경쟁하듯 초콜릿을 사서 누군가에게 건네곤 했다. 누가 더 큰 초콜릿을 받느냐, 누가 더 손이 많이 가는 수제 초콜릿을 선물 받느냐에 따라 인기도가 판가름 났다.
하지만 또래들과 다르게 진정한 발렌타인데이의 의미를 알게 된 나는 친구들의 초콜릿 주고받음을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마음 한구석엔 ‘누군가가 초콜릿을 준다면 기꺼이 받아는 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도 내게 초콜릿을 주지 않았고.
어느새 어른이 된 나는 2월이 되면 동네 편의점 앞에 화려하게 장식된 발렌타인데이 매대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비록 나, 발렌타인데이에 초콜릿을 받지는 못해도 초콜릿을 무척 좋아한다. 집에는 늘 초콜릿이 떨어지지 않고, 사람들에게도 자주 선물한다. 특히 편의점에서 발렌타인데이 시즌에만 한정 판매하는 초콜릿을 구경하는 게 즐겁다. 그중 몇 개를 골라 나를 위한 간식으로 사두거나 주변 사람들에게도 나누어준다.
어느새 나에게 발렌타인데이는 불꽃 같은 사랑을 표현하는 날이라기보다, 초콜릿을 통해 정을 나누는 날이 되었다. 하루하루 정신없이 보내다가도 길을 지나칠 때마다 뿅 하고 나타나는 화려한 편의점 매대를 보며 ‘아, 어느새 발렌타인데이구나!’를 알아차리는 일도 반갑다.

그러고 보면 나는 대부분의 편의점을 그냥 지나친 적이 없다. 여름의 친구, 세계 맥주 네 캔에 ○원을 비롯해 살 때마다 뿌듯한 각종 1+1, 2+1 상품들, 편의점에서만 만날 수 있는 기획상품들 때문에 눈앞에 편의점이 보이면 뭐 하나라도 건지기(!) 위해 들른다.
외국 여행에 가서도 편의점은 나의 핫플레이스다. 특히 아시아 지역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편의점에서는 그 나라 사람들의 음료와 컵라면 및 과자 취향, 더 나아가 문화와 유행까지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여행 갈 때마다 툭하면 편의점을 들르며 뭐든 손에 쥐고 나온다. 낯선 도시에서의 편의점 나들이가 익숙해질 즈음이면, 어느새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된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나의 발렌타인은 초콜릿도, 사랑하는 사람도 아닌 편의점이라는 걸 깨닫는다. 우스울지 몰라도 그동안 나는 수도 없이 편의점을 들락거렸고, 그때마다 정확히 위로받았다. 알록달록 꾸며진 입구 앞 매대를 보면서 계절을 가늠하고, 취향에 딱 맞는 기획 상품들에 넋이 나가(!) 편의점에 출근 도장을 찍고, 온갖 편의점 음식들에 마음의 허기를 달래왔다. 더불어 그동안 편의점에서 사다 마신 네 캔에 ○원 세계맥주와 와인의 양을 계산한다면, 우리 아파트 물탱크는 가뿐히 넘을 것이다….
<케빈은 열두 살>에 빠져있던 십대 시절, 드디어 우리 동네에도 편의점이 생겼다며 흥분했는데 어느새 나는 편의점 없이는 못 사는 어른이 됐다. 올해 발렌타인데이에 편의점 입구에 장식될 초콜릿 매대 앞에서도 분명 발걸음을 멈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지막이 아짐개그를 중얼거려 본다. “씨유, 나의 발렌타인이 되어주겠씨유?”
*김신회 에세이스트 / 에세이 쓰는 사람. 그리고 여름 사람. 십여 년간 TV 코미디 작가로 일했고, 이후 십여 년간 전업 에세이스트로 살고 있습니다.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 《아무튼, 여름》 등을 썼습니다.